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갇힌 상황'에서도 예배처로…숨 죽인채 기도

하지만 현지의 한인들에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치안이 무너진 나라에서 외국인은 안전하지 못했다. 특히 한인 기독교인들은 한층 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는 허가된 곳 이외의 장소에서 5인 이상의 예배나 집회가 불법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30년 이상 계엄령이 지속되고 있다. 반정부 시위는 치안부재로 이어졌고 하루 17시간 통행금지가 선포됐다. 하지만 한인 교인들은 '갇힌 상황'에서도 예배처로 향했고 숨 죽인 채 기도했다. 무바라크 퇴진 1주일을 맞은 18일 현지 한인 목회자와 전화로 그간의 상황과 현재 분위기를 들었다. "교회 문지방을 넘는데 교인들 모두 뭉클했어요. 몇몇 분들은 서로 껴안고 울기도 했어요." 수화기 너머 상기된 목소리가 들렸다. 애굽한인교회 김인용(43) 담임목사는 "오늘 3주만에 교회 예배당에 돌아와 예배를 드렸다"고 기뻐했다. 카이로 시내에 있는 이 교회는 현지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상징적이다. 20년 역사를 지녔고 이집트내 3개 한인교회중 180명이 출석하는 가장 큰 교회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위의 진앙지인 타흐리르 광장에서 10분 거리 지척에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풍파를 견딘 교회다. 안전문제로 교회에 가지 못하고 2개 그룹으로 나뉘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는 "모든 국제전화가 도청된다"면서 인터뷰에 난색을 표했지만 예배의 감격을 전하는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탱크와 바리케이트를 지나 몰래 예배처로 가야했지만 교회가 우리의 피난처였고 예배가 우리에게 평안을 준 시간"이라고 18일간 계속된 시위의 긴 터널을 통과한 소감을 밝혔다.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무바라크 퇴진 직후부터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전철도 다시 운행하고 인터넷도 재개통됐다. 거리 표정도 밝고 상점도 북적인다. 하지만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어 문제다. 철강 전기 섬유 등 여러 업계로 번지고 있다. 중앙은행도 파업으로 문을 닫았다." -치안은 안정됐나. "바깥에서 걱정하는 정도에 비하면 괜찮다. 통행금지 시간이 자정~새벽 6시까지로 단축됐다.(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 사흘 후인 1월28일부터 통금이 선포됐다. 31일에는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17시간 동안 통행이 금지됐다)" -가장 불안했던 순간은. "시위 3일째인 1월28일과 무바라크 하야 발표날인 2월11일이었다. 공교롭게 둘다 예배날이다.(이집트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이 교회는 금요일에 주일예배를 드린다.) 특히 28일은 시위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총 칼 곤봉으로 무장한 카이로 젊은이들이 자경단을 결성해 동네 입구를 지켰다. 11일은 전날 무바라크가 사임을 철회하면서 200만명이 모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교회가 시위장소인 타흐리르 광장과 가깝다보니 언제 불똥이 튈지 염려됐다." -교회 홈페이지에서 '안전을 담보로 예배를 드렸다'는 글을 읽었다. 얼마나 위험했나. "우리 교회는 영국 성공회 건물을 빌려쓰고 있다. 시위 때문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28일에는 교회 대신 2개 그룹으로 나뉘어 73명이 예배했다. 이집트에서는 예배당 밖에서 5인 이상이 집회나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이 불법이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당시 예배 분위기는 어땠나. "예배장소로 가면서 탱크와 바리케이트 총 든 군인들을 통과해야 했다. 무슬림들 조차 예배를 취소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하지만 교인들은 비장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였기 때문인지 예배가 시작되자 다들 눈물을 흘렸다." -무바라크 퇴진 1주일이다. 시위의 원인을 두고 분석이 많다. “사실 이번 사태는 빵 때문이라고들 한다.(이집트 전체 가구의 90%가 정부 보조로 빵을 구입해 빵 값에 민감하다.) 최근 3년사이 물가가 많이 올랐다. 3년전에는 원화로 200원이면 빵 20개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10개 밖에 못산다. 민심이 성을 낸 것이다.” -급여 수준이 낮은 것도 불만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지금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집트 전체 국민의 50%가 극빈층이다. 임금이 워낙 낮다. 예를 들어 정부 병원에서 20년 근무한 의사 월급이 14만원쯤 된다. 그래서 의사들이 쓰리잡(Three Job)을 뛴다. 오전엔 정부병원, 오후에는 개인병원, 저녁에는 왕진을 다니는 식이다. 의사가 그럴진데 일반 노동자 임금은 어떻겠나. 빈부격차가 굉장히 심하다.” -정부에 대한 민심은 어떤가. “일단 무바라크 퇴진만으로도 만족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독재 세력 등장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래서 국민의 눈이 헌법 개정에 쏠리고 있다. 계엄령도 해제되길 바라고 있다.(이집트는 1967년 제 2차 중동전쟁 이후 18개월을 제외하고 계엄령 아래 있다.)” -무바라크 퇴진 후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가 있다면. “외국인들이 이집트 국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했지만 이젠 시민혁명의 주인공들로 높이고 있다. 다들 동등한 입장으로 이집트인들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교민들이 많이 빠져나갔다고 들었다. 다들 돌아왔나. “여기 교민이 1200명이다. 그중 900명이 출국했다. 우리 교회도 전체 교인 180명중 80명이 남았다. 27일까지 대한항공이 운행하지 않는다. 28일이면 아마 다들 들어오리라고 본다.” -목회자로서 어떤 변화를 바라나. “예배의 자유다. 아까도 말했지만 기존에 세워진 교회 건물 이외의 지역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통제되고 있는 언론의 자유도 이뤄지길 바란다.” -LA에 있는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배를 드릴 수 있나 없나의 문제에 봉착하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지 깨닫게 된다. 또,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과연 이집트를 놓고 얼마나 기도 했던가하고 늬우치기도 했다. LA 한인교회들은 선교적 역량이 크다. 지금 밟고 있는 나라, 직장, 가정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란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2011-02-22

[중앙 시론] 이집트 사태의 뿌리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 순간 이집트는 세 개의 ‘P'를 포기했다. ‘Pan-Arabism (범 아랍주의)’, ‘Palestine (팔레스타인)’. 그리고 ‘Pride (자존심)’. 다른 두 개의 'P'를 위한 결단이었다. ‘Peace (평화)’와 ‘Prosperity (번영)’. 퇴진의 압력을 받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통치는 이 평화와 번영의 약속으로 정당화된 독재정권이다. 이집트 민중은 지금 30년 무바라크 시대의 초라한 결산서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아랍가문의 맏형이고 중심이었다. 서양이 아무리 오리엔털리즘의 편견을 갖고 아랍권을 비하해도 이집트문명에 대한 경외심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피라미드 앞에서는 작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1952년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가멜 나세르는 사회주의 발전 모델을 일부 적용, 이집트의 부흥기를 가져온다. 아랍인들은 자연스레 이집트를 중심으로 과거 이슬람제국시대의 영화를 회복하는 꿈에 젖어 들었다. 그러나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는 이 꿈을 부수어버렸다.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로부터 재탈환하겠다는 꿈은 아랍권을 한데 뭉치는 힘이었다. 이집트는 이 가능성을 백악관 잔디밭에 묻어버렸다. 이집트의 군사력을 뺀 아랍연합과 이스라엘과의 정면대결은 상상할 가치조차 없다. 자신감을 얻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西岸) 점령지구에 이스라엘 정착민촌을 건설해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실제적 내 땅 만들기에 돌입했다. 이집트는 미국에 팔려갔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따른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매년 약 20억 달러의 원조를 받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원조의 대부분은 무기구매와 관련되어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최첨단의 무기에 대한 군사력 대칭을 위해 이집트는 군사원조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인 평화관계를 체결한 두 나라가 미국의 도움으로 군사력 경쟁에 돌입해 있는 아이러니 속에서 이집트의 경제건설은 뒷전에 밀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평화협정 이후 30년이 지난 오늘 이집트는 평화와 번영을 얻은 것일까? 두 나라의 관계를 찬바람 도는 평화라는 뜻에서 ‘Cold Peace' 즉, 냉화(冷和)라고 표현한다. 서로 총질만 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아랍 연합군의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전 가능성이 사라지고, 그 공간은 두 개의 불안요소로 채워졌다. 자살공격과 대량살상무기 확보노력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형성된 미국중심의 소위 반국제테러 전선에 이집트는 적극 참여하고 있다. 당연히 ‘무슬림 형제단 (Muslim Brotherhood)’이 상징하는 이슬람권내의 반감이 존재한다. 오사마 빈 라덴의 최측근 다수가 이집트 출신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무바라크 시대의 경제 성적표는 이집트 사회의 폭발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무바라크 정부가 이집트 경제를 일정부분 개혁한 것은 사실이다. 주요 산유국이 아니면서도 최근에도 4~6%의 년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총생산의 절반 가량이 서비스산업에 기초한 사실도 이집트 경제의 변화를 말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극심한 양극화이다. 카이로에는 이집트 상류층 자녀들을 위해 국제학교가 다수이다. 반면 이집트 국민의 20%는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더욱 위험한 불안요소는 미비한 일자리 창출이다. 1990년부터 2005년 15년 동안 매년 고용증가는 2.6%에 그쳤다. 비교적 교육열이 높은 이집트의 학위 소지자들이 일터가 없는 현실이다. 청년실업이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란 평가도 있다. 한마디로 줄이면 이집트 사태는 상징적 가치를 다 내어 던지고 실제적 삶의 향상을 택한 30년 전의 결정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이다.

2011-02-07

이집트 반정부시위로 국제적 관심 '투탕카멘' 전시회 열기 더 뜨겁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나라 안은 쑥밭이 돼 있는 이집트지만 나라 밖에서는 여전히 웅장하고 고고한 문화에 대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90년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킨 '투탕카멘' 전시회는 1970년대 미국 순회 전시를 통해서만 무려 800만여 관람객을 동원했으며 최근 가진 뉴욕 전시에선 9개월간 400만여명을 기록하는 대단한 성과를 냈다. 투탕카멘 전시회(Tutankhamen: The Golden King and the Great Pharaohs)는 오는 18일부터는 미네소타 사이언스 뮤지엄에서 전시될 예정이며 현재 이집트 시위가 국제적 뉴스인 점을 감안 엄청난 관람객을 끌어모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BC 14세기에 재위한 이집트 왕 투탕카멘(1333-1323)은 어린 나이에 즉위 많은 치적을 남긴 후 1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며 1922년 영국의 이집트 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무덤 속 유물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전세계 가는 곳 마다 엄청난 관람객을 동원하고 있는 전시회에는 무덤에서 출토된 3중 관 속에 누워있는 투탕카멘의 미이라와 미이라에 씌워져 있던 황금 가면 등 온갖 신비스런 유물이 선보인다.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는 2005년간 5개월간 전시 기록적인 관람객을 동원한 바 있다.

2011-02-07

이집트 시위 사태 진정 기미…정부, 공무원 임금인상·구글 임원 석방 등 잇단 유화책

이집트 정부는 민주화 시위가 13일째를 맞은 7일 사태를 진화하기 위한 개혁조치를 추가로 내놨다. 반정부 시위대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날 공직부패와 선거부정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는 등 개혁 조치를 추가로 발표했다. 이집트 관영 뉴스통신인 메나(MENA)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국회와 고등법원에 지난해 11월 치러진 총선과 관련한 부정선거 사건들을 재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검찰은 또 오는 8일부터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각료 3명과 집권 국민민주당(NDP) 고위 관료 1명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로 하는 등 부정부패를 일소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함께 이집트 정부는 오는 4월부터 공무원의 급여를 15%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실종됐다가 보안당국에 구금된 사실이 확인된 구글의 이집트인 임원 와엘 그호님도 이날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의 중동ㆍ아프리카 마케팅 담당 책임자인 그호님은 콘퍼런스를 위해 고국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남겼으며 반정부 시위가 격화된 지난달 28일부터 연락이 끊겨 당국에 체포된 것으로 추정돼 왔으며 이후 이집트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호님의 실종에 대해 함구해오던 이집트 당국은 지난 6일 가족들에게 연락해 그를 7일중 석방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그호님의 동생인 하젬 그호님이 전했다. 거센 시위로 중도 퇴진 위기에 내몰렸던 무바라크 대통령이 정부와 야권 대표자들 간의 개혁 협상 개최와 미국 행정부의 점진적 권력이양안 등에 힘입어 현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7일 상공회의소 연설 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이집트는 협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이집트 사태 해결을 위한 이집트 정부와 야권 세력의 협상이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4.6청년운동' 등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 수천 명의 시위대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퇴진하기 전까지 정부 측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미국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를 떠날 필요까지는 없다"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지고 권력을 이양한 후 물러나야 한다"고 말해 무바라크 대통령의 조기 퇴진을 촉구했다.

2011-02-07

[시론] 이집트 사태와 요덕수용소

세계 언론의 관심은 이집트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에 집중되고 있다. "도둑 무바라크는 물러가라"고 외치는 시위대들과 그들을 저지하는 이집트 군과 경찰을 보면서 무바라크보다 더 부패한 김정일 정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북녘 땅의 내 동포들에 대한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언젠가는 내 형제 내 동포들이 일어나 "도둑 김정일 김정은은 물러가라"고 외칠 것같은 기대감이 교차한다. 나는 북한을 탈출했다가 중국에서 잡혀 강제 송환된 후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로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 하나인 제 15호 관리소(함경남도 요덕 위치)에서 들어갔었다. 그후 30년이 지난 지금의 북한을 보면 그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한 사람들이 김정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북한의 독재정권은 이집트 무바라크와 다르다. 북한의 상황과 이집트의 상황 또한 다르다. 빈곤과 실업에 허덕이는 이집트 시민들은 지도자와 그 측근들의 사치생활에 화가 나 일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과 그 추종 세력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철저히 속고 산다. TV라고는 조선중앙방송 하나 뿐이고 라디오는 주파수가 고정돼 있다. 물론 지금 북한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배가 고파 죽기 살기로 중국으로 넘어가는 탈북자들을 통해 외부 정보가 흘러들어 가고 있고 TV.라디오를 통해 몰래 한국 방송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어느 정도 진실에 눈을 뜨고 있다. 이제 곧 김정일이 위대한 장군님이 아니라 도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감히 누가 '김정일은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을까? 저 땅에 무시무시한 정치범수용소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수령독재체제에 맞서 싸울 용기를 낼 수가 없다. 나 혼자만 수용소라는 지옥에 떨어진다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반독재 투쟁을 벌이는 용기를 내어 보겠다. 그러나 내 부모 내 자식 내 손자 손녀까지 수용소에 보내진다는 그 공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자도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연좌제이다. 1972년 김일성은 연설에서 "종파분자나 계급의 적은 그 자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그들의 종자를 3대에 걸쳐 완전히 그리고 반드시 제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연좌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21세기에도 북한에서는 수령세습독재가 가능하고 김정일은 300만명을 굶겨 죽이고도 위대한 장군님으로 칭송 받는 것이다. 북한에 정치범수용소만 없어져도 북한의 민주화는 절반 성취된 셈이다. 국제사회가 북한에 정치범수용소 사찰단만이라도 보냈으면 현재 북한의 3대 세습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북한 독재 정권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정치범수용소이고 연좌제이다. 북한 주민들 스스로 수용소를 없애고 연좌제를 없애라고 말하는 날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국제사회와 유엔이 연좌제를 없애라고 요구해야 북한 주민들 중 용기 있는 자들이 뭉칠 수 있을 것이다. 저 먼 땅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를 보면서 북녘 땅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상상해 보는 것은 나만의 헛된 바람일까?

2011-02-0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